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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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보니 프린스 찰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위 요구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를 일으켜 왕위를 요구했으나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유럽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으며, 1772년 루이즈 스톨베르크게데른 공녀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찰스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1788년 로마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스코틀랜드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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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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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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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찰스 에드워드 루이스 존 실베스터 마리아 카시미르 스튜어트 |
출생일 | 1720년 12월 31일 |
출생지 | 교황령, 로마, 팔라초 무티 |
사망일 | 1788년 1월 30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팔라초 무티 |
매장지 |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시국 |
종교 | 가톨릭교 |
가문 | 스튜어트 가 |
왕위 주장 | |
작위 | 재커바이트 왕위 요구자 |
재위 기간 | 1766년 1월 1일 – 1788년 1월 30일 |
재위 유형 | 왕위 요구 |
이전 | "제임스 8세와 3세" |
계승 | "헨리 9세와 1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
어머니 |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
배우자 | 루이제 폰 슈톨베르크게데른 (1772년 결혼, 1780년 별거) |
자녀 | 올버니 여공작 샬럿 스튜어트(사생아)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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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자칭 제임스 3세)와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손녀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장남으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명예 혁명으로 잉글랜드 왕위를 잃고 망명 중이었으며, 찰스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3세의 비호 아래 로마와 볼로냐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나, 이는 훗날 왕위 탈환 운동에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의 전체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 루이스 존 카시미어 실베스터 마리아 스튜어트 (Charles Edward Louis John Casimir Silvester Maria Stuarteng)이다.
자코바이트 지지 기반이 강했던 스코틀랜드 등지에서는 "'''보니 프린스 찰리'''" (Bonnie Prince Charlieeng)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여러 차례 브리튼 섬 상륙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때는 마침내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초기에는 정부군을 격파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컬로든 전투에서 컴벌랜드 공작윌리엄 어거스터스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참패하고 변장한 채 유럽 대륙으로 도망쳤다.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방탕한 생활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고집으로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1772년에는 32세 연하인 독일 귀족 여성 루이제 추 슈톨베르크-게데른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말년에는 애첩 클레멘티나 워킨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샬롯 (1753년–1789년)에게 의지했으며, 그녀를 적녀로 인정하고 '올버니 공작부인' 칭호를 주었다. 찰스는 1788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후, 사생아였던 샬롯은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기에 자코바이트의 왕위 요구권은 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추기경에게 넘어갔다. 비록 왕위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를 소재로 한 노래도 만들어졌다.[41]
한편, '찰스 3세'라는 왕호는 2022년 9월 8일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윈저 왕가의 찰스 필립 아서 조지가 사용하고 있다.[42]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720-1734)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1720년 12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의 무티 궁전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교황 클레멘스 11세로부터 이 궁전을 거처로 제공받았다. 찰스의 아버지는 명예 혁명으로 왕위를 잃은 제임스 2세의 아들이었으며, 스튜어트 왕가의 망명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출신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손녀였다.[4]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2세는 1688년 명예혁명 때 잉글랜드 의회가 그의 딸 메리 공주와 사위인 네덜란드 출신의 개신교 신자 윌리엄 3세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폐위되었다.[3] 많은 개신교도들은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우려했다. 제임스 2세의 망명 이후, 그의 지지자들인 자코바이트는 스튜어트 왕가를 영국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찰스의 세례식을 누가 집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직접 했다는 기록도 있고, 몬테피아스코네 교구의 주교가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증조부 찰스 1세를 기려 '찰스', 참회왕 에드워드에서 따온 '에드워드', 프랑스 왕을 기려 '루이', 폴란드 왕들을 기려 '카시미르', 그리고 성 실베스터 축일에 태어났기에 '실베스터'라는 이름을 받았다. 전체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 루이스 존 카시미어 실베스터 마리아 스튜어트(Charles Edward Louis John Casimir Silvester Maria Stuarteng)이다.
찰스는 어린 시절 다리가 약했는데, 이는 아마도 구루병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꾸준한 운동과 춤 연습을 통해 체력을 길러 다리가 튼튼해졌다.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로마와 볼로냐에서 소규모 수행원들과 함께 보냈으며, 부모는 자주 다투었다. 1725년에는 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가 태어났고, 그 직후 어머니 클레멘티나가 궁정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1727년에야 돌아왔다. 제임스와 그의 가족은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으며 망명 생활 중에도 왕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켰다.[4]
찰스의 교육은 주로 나이 많은 남성 가정교사들이 담당했다. 주요 가정교사로는 개신교도인 제임스 머레이, 던바 백작이 있었다. 교황은 찰스가 개신교도에게 교육받는 것을 우려했지만,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이 외에도 슈발리에 램지, 토마스 셰리던 경, 가톨릭 사제 빈체구에라 신부 등이 그를 가르쳤다. 찰스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빠르게 배웠지만, 어떤 언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으며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어린 시절 사냥, 승마, 골프, 음악 감상, 춤추기를 즐겼다.
1734년, 찰스가 13살 되던 해에 그의 사촌인 리리아 공작이 나폴리 왕국 왕위를 놓고 싸우는 돈 카를로스를 돕기 위해 로마를 지나게 되었다. 리리아 공작은 찰스를 원정에 데려갈 것을 제안했고, 돈 카를로스는 어린 찰스를 포병 장군으로 임명했다. 찰스는 1734년 7월 30일 로마를 떠나 사촌과 함께 프랑스 및 스페인 군대의 가에타 포위전에 참여했다. 이것이 그의 첫 전쟁 경험이었다. 그는 가에타에서 포위전의 마지막 단계를 지켜보았고, 참호 속에서 적의 포화를 직접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734년 말 로마로 돌아왔다.
2. 2. 유럽 여행 (1734-1745)

1734년, 13세의 찰스는 첫 군사 경험을 쌓았다. 그의 사촌인 리리아 공작이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놓고 싸우는 돈 카를로스를 돕기 위해 로마를 지나갈 때, 찰스를 원정에 데려갈 것을 제안했다. 돈 카를로스는 어린 찰스를 포병 장군으로 임명했고, 찰스는 1734년 7월 30일 로마를 떠나 프랑스 및 스페인 군대와 함께 가에타 포위전에 참여했다. 그는 포위전의 마지막 단계를 지켜보았고, 참호에서 직접 포격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말 로마로 돌아왔다. 1735년 1월, 14번째 생일을 맞이한 직후 어머니 클레멘티나가 괴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건강은 수개월간 좋지 않았지만, 찰스는 어머니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찰스가 성장하자 아버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교황은 그를 이탈리아 사교계에 소개했다. 1737년, 제임스는 아들이 왕자로서 세상 경험을 쌓도록 이탈리아 주요 도시 순방을 주선했다. 찰스는 제노바, 피렌체, 파르마, 볼로냐,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이 순방은 찰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왕족으로서 환대받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대부분의 유럽 궁정은 영국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그를 공식적인 왕자 대신 '올버니 공작'이라는 역사적 칭호로만 대우하려 했다. 유일하게 베네치아만이 그를 왕족으로 예우했다.

20세가 된 찰스는 로마 상류 사회의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술과 고급 의복에 빠져 용돈을 훨씬 넘어서는 지출을 했다. 그는 종교적 생활에 몰두하는 동생 헨리와 점점 멀어졌다. 아버지 제임스는 여전히 외국의 지원을 통해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지만, 찰스는 점차 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영국으로 직접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1743년 12월 23일 아들 찰스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744년 1월, 아버지 제임스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확보했다고 믿었고, 이에 찰스는 사냥 모임을 가장하여 비밀리에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나 국왕 루이 15세는 찰스를 공식적으로 초청한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군을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지원하기로 2월에 합의했다. 찰스는 프랑스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덩케르크로 이동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가 춘분 폭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11척의 배를 잃으면서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함대는 프랑스의 기만책을 알아차리고 해협의 경계를 강화했다.
침공 계획이 실패한 후에도 찰스는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는 그라블린, 샹티이, 파리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고, 1744년 5월에는 몽마르트르에 집을 빌렸다. 그러나 의상, 수행원 유지, 음주 등으로 인해 찰스는 30,000 리브르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실패한 침공 이후 찰스에게 매달 지급하던 보조금을 중단하며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가도록 압박했다. 몽마르트르의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캉브레 대주교가 파리 근교의 시골 저택을 빌려주어 1745년 1월까지 머물렀다. 이후 프랑스 정부의 거듭된 권유로 앤, 베릭 공작 부인의 수아송 근처 시골 저택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찰스는 이 기간에도 종종 변장하고 파리를 오가며 지지자들을 만났다.
찰스는 로마와 파리에서 많은 스튜어트 지지자들을 만났고, 유럽 각국 궁정에 있는 자코바이트 대표들과 연락하며 아버지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파리와 수아송에서 왕정 복귀를 위한 자금과 지원을 모으는 데 힘썼다. 특히 토마스 셰리던 경과 같은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망명자들은 스코틀랜드 자코바이트 세력의 힘을 강조하며 찰스를 독려했고, 헥터 맥린 경 역시 개입을 촉구했다. 이에 찰스는 스코틀랜드로 직접 가서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에 올리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찰스는 파리의 은행가 존 워터스와 조지 워터스로부터 약 180,000 리브르를 빌렸다.[6] 이 대출에는 영국 내 왕당파들의 지원도 일부 있었으며, 담보로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증조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소비에스키 왕관 보석을 사용했다.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66문의 포를 갖춘 구식 군함 ''엘리자베스''와 16문의 포를 갖춘 사략선 ''뒤 테이유''를 준비하며 스코틀랜드 원정을 위한 채비를 마쳤다.
2. 3.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1745년, 아버지 제임스가 확보하지 못한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자코바이트의 마지막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로마와 파리 등지에서 스튜어트 지지자들을 만나고 유럽 각국 궁정에 있는 자코바이트 대표들과 연락하며 왕위 복귀 운동을 준비했다. 특히 파리와 수아송에서 복위를 위한 자금과 지원을 모색했으며, 토마스 셰리던 경과 같은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망명자들, 헥터 맥린 경 등의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 원정을 결심했다. 목표는 반란을 통해 아버지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찰스는 파리의 은행가 존 워터스와 조지 워터스로부터 약 18만 리브르를 빌렸고, 이 자금 중 일부는 옥스버러 홀의 헨리 베딩필드 경과 같은 영국 내 왕당파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6]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증조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소비에스키 왕관 보석을 담보로 제공했다.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66문 군함 ''엘리자베스''호와 16문 사략선 ''뒤 테이유''호를 준비했다.

1745년 5월 폰트노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자 이에 고무된 찰스와 그의 일행은 7월 5일 스코틀랜드로 출항했다. 항해 중 켈트해에서 영국 해군 군함 HMS ''라이온''호의 공격을 받았다. 찰스가 탄 ''뒤 테이유''호는 교전을 피했지만, 무기와 보급품 대부분을 실은 ''엘리자베스''호는 ''라이온''호와 교전 후 손상을 입고 수리를 위해 브레스트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찰스는 1745년 7월 23일, 모이다트의 일곱 명으로 알려진 7명의 동료와 함께 아우터헤브리디스의 에리스케이 섬에 상륙했다. 이들 중에는 아일랜드 망명자이자 전직 프랑스 장교인 존 오설리번과 찰스의 비서 조지 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찰스는 하이랜드의 여러 씨족들이 여전히 자코바이트를 지지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처음 접촉한 씨족 지도자들, 특히 슬레이트의 맥도날드와 노먼 맥레오드 등은 프랑스 군대의 지원 없이 도착한 찰스에게 실망하여 프랑스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들은 봉기 실패 시 닥칠 위험을 우려했고, 찰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찰스는 포기하지 않고 로크난우암 만으로 이동하여 군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함대의 지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7]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찰스는 로하일의 도널드 캐머런과 그의 캐머런 씨족으로부터 결정적인 지지를 확보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찰스는 봉기가 실패할 경우 캐머런의 재산 손실을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다른 씨족들의 지지도 점차 늘어났다. 이 시기 찰스는 알라스데어 막 마그스티르 알라스데어에게 게일어를 배우기도 했다. 1745년 8월 19일, 찰스는 글렌피난에서 아버지의 기치를 내걸고 에든버러를 향해 진격을 시작할 만큼 충분한 병력을 모았다. 그의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8월 말 인버가리 성에 도착했고, 코리에어락 패스를 넘어 정부군의 진격을 막았다. 블레어 성을 잠시 거친 후, 9월 4일 퍼스에 도착했다. 퍼스에서는 조지 머레이 경 등 더 많은 지지자들이 합류했다. 이전 봉기(1715년, 1719년) 참여로 사면받았던 머레이는 하이랜드 군사 관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설리번을 대신해 군 지휘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자코바이트 군대는 퍼스에서 일주일간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9월 14일, 찰스는 팔커크를 점령하고 캘린더 하우스에 머물며 킬마녹 백작 윌리엄 보이드를 설득하여 합류시켰다.
찰스의 에든버러 진격은 영국군 사령관 존 코프 경이 군대를 이끌고 북쪽 인버네스로 이동하여 남부를 무방비 상태로 둔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9월 16일, 찰스의 군대는 에든버러 외곽 그레이스 밀에 야영했고, 다음 날인 9월 17일 약 2,400명의 병력과 함께 에든버러에 입성했다.[8] 당시 에든버러 시장 아치볼드 스튜어트는 도시를 즉시 항복시켰으나, 조지 프레스턴이 지키는 에든버러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찰스는 포병 부족으로 성을 포위 공격할 수 없었다. 에든버러에 머무는 동안 찰스는 지지자들에게 찰스 왕자 타지와 같은 상징적인 물건을 수여했고, 화가 앨런 램지는 찰스의 초상화를 그렸다.[9][10]

한편, 존 코프 경은 자신의 군대를 배로 던바로 이동시켰다. 9월 20일, 찰스는 에든버러 근교 더딩스턴에서 군대를 집결시켰고, 9월 21일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코프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내 유일한 정부군을 격파했다. 찰스는 전투 중 최전선에서 불과 50보 거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승리 후 자신의 백성을 죽인 것에 대해 후회를 표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찰스와 조지 머레이 경 사이에 군대 배치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이후 두 사람의 관계 악화와 최종적인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프레스턴팬스 전투 승리 후 사기가 오른 자코바이트 군대는 에든버러로 돌아왔고, 찰스는 홀리루드 궁전에서 궁정을 열었다. 10월 중순, 프랑스가 자금과 무기를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지원을 약속하면서 자코바이트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엘초 경과 같은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찰스의 독단적인 통치 방식과 아일랜드 출신 고문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주요 지도자들로 구성된 "왕자 평의회"가 설립되었지만, 찰스는 이를 신성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고, 매일 열리는 회의는 오히려 파벌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평의회에는 페르스 공작, 조지 머레이 경, 토마스 셰리단, 존 오설리번, 브로튼의 머레이, 로하일의 캐머런, 켑포크, 클랜라날드, 글렌코, 아핀의 스튜어트, 글렌가리의 맥도넬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논의 끝에 찰스는 평의회를 설득하여 잉글랜드 침공을 결정했다.
11월, 약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찰스는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11월 10일 칼라일이 항복했고, 군대는 계속 남하하여 11월 21일 페니스, 11월 26일 프레스턴, 11월 29일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12월 4일, 자코바이트 군대는 더비셔의 스워크스톤 다리 근처 트렌트 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더비의 엑서터 하우스에서 열린 평의회 회의에서, 찰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스코틀랜드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잉글랜드 자코바이트들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약속했던 프랑스의 대규모 지원도 없었으며, 오히려 대규모 정부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찰스는 프랑스를 떠난 이후 잉글랜드 자코바이트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인정했지만, 이 후퇴 결정은 일부 스코틀랜드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2월 6일, 자코바이트 군대는 더비를 떠나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북진 경로는 남진 경로와 동일했다. 12월 9일 맨체스터로 돌아와 약간의 저항을 받은 후, 찰스는 마을에 5000GBP를 요구하여 결국 2500GBP를 지불받았다. 프레스턴, 랭커스터, 켄달을 거쳐 12월 18일, 컴브리아의 클리프턴에서 추격해 온 정부군과 클리프턴 무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자코바이트 군대는 칼라일을 지나 스코틀랜드로 계속 후퇴할 수 있었다.
12월 26일 글래스고에 도착한 찰스와 군대는 1746년 1월 3일까지 휴식을 취했다. 이후 스털링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스털링 마을은 즉시 항복했지만, 성 자체는 강력한 포격으로 인해 점령에 실패했다. 정부군이 공성군을 격퇴하기 위해 접근하자, 1746년 1월 팔키르크 무어 전투가 벌어졌고 찰스는 다시 한번 승리했다. 그러나 스털링 성 점령에는 실패하여 결국 공성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크리프를 거쳐 인버네스로 후퇴했다.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작전을 중단하고 인버네스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조지 2세의 아들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정부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전투에서 자코바이트 군대는 컴벌랜드 공작의 정부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로 자코바이트 봉기는 사실상 끝이 났고,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스카이 섬 등을 거쳐 간신히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2. 4. 유럽에서의 생활 (1746-1766)
찰스는 1746년 10월 10일(구력 9월 29일) 프랑스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처음에 루이 15세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지만, 추가적인 군사적 또는 정치적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즉시 많은 파리 시민들의 인기 영웅이자 우상이 되었다. 1747년 3월, 그는 마드리드로 잠시 여행하여 페르난도 6세를 알현했지만, 국왕은 스튜어트 왕가 복원에 스페인이 도움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 이 시기 동안 그의 동생 헨리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는데, 헨리가 1747년 7월에 추기경의 지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로마에 있는 아버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동생의 행동을 승인했음)와의 소통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찰스는 많은 정부를 두었다. 그는 사촌 마리 루이즈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관계를 가졌는데, 이로 인해 찰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났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1748년 7월 28일 출생, 1749년 1월 18일 사망). 1748년 12월, 그는 팔레 루아얄의 오페라 극장에서 관람 중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었다. 잠시 뱅센 성에 갇혔다가 아헨 조약 조건에 따라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는 먼저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으로 이주했고, 1749년에는 로렌 공국의 뤼네빌로 이주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파리에 몇 차례 비밀리에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프랑스 당국에 발각되지는 않았다.
패배 후, 찰스는 잉글랜드의 자코바이트 세력에게 자신이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는 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위를 되찾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개신교 신자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이에 따라 그는 1750년에 런던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주로 레이디 프림로즈(3대 프림로즈 자작의 미망인)의 에식스 스트리트 저택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렀다.[17] 런던에 있는 동안 찰스는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성공회 성찬례를 받음으로써 개신교 신앙을 따랐으며, 이는 아마도 남아있는 비국교도 예배당 중 하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독실한 자코바이트였던 로버트 고든 주교가 성찬례를 집전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찰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부 클레멘티나 워킨쇼(후에 알버스트로프 백작 부인으로 알려짐)와 여러 해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1745년 반란 동안 그녀를 만났고, 그녀와의 관계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찰스의 많은 지지자들에게 하노버 정부의 스파이로 의심받았다. 1753년 10월 29일, 이 부부는 딸 샬롯을 낳았다. 찰스는 자코바이트 대의의 붕괴에 대처하지 못해 알코올 문제를 겪게 되었고, 클레멘티나와 딸 샬롯은 아버지 제임스의 도움을 받아 찰스와 헤어졌다.
1759년, 7년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찰스는 프랑스 외무 장관인 쇼아절 공작과의 파리 회동에 소환되었다. 찰스는 논쟁적이고 자신의 기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쇼아절은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영국 전면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에 찰스가 이끄는 자코바이트의 숫자를 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찰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하여 자코바이트의 지원 가능성을 일축했다. 프랑스의 침공은 찰스에게 스튜어트 왕조를 위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를 되찾을 마지막 현실적인 기회였지만, 결국 키브롱 만 해전과 라고스 해전에서의 해군 패배로 좌절되었다.
2. 5. 왕위 요구자 (1766-1788)
1766년 아버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사망하자, 찰스는 자코바이트가 주장하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그를 '찰스 3세'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이후 찰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772년, 그는 32세 연하인 독일의 루이제 추 슈톨베르크게데른 공녀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고 자녀도 얻지 못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올버니 백작'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지냈다. 자코바이트 운동의 실패와 계속되는 망명 생활 속에서 그는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겪었으며 건강도 악화되었다.[11] 결국 아내 루이제와는 별거하게 되었다.
말년에 그는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애첩 클레멘티나 워킨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샬롯(1753년–1789년)에게 의지했다. 1783년, 찰스는 사생아였던 샬롯을 적법한 딸로 인정하고 '올버니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딸 샬롯에게 남겼다.[11]
찰스는 1788년 1월 30일 로마에서 뇌졸중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추기경은 그의 임종을 지켰다. 사망일이 증조부 찰스 1세의 처형일과 같다는 점 때문에, 공식 사망일은 다음 날인 1월 31일로 기록되었다.[11]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프라스카티 대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동생 헨리가 주교로 있던 곳이었다.[11] 1807년 헨리가 사망한 후, 찰스의 유해는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져 아버지 제임스와 동생 헨리 곁에 안장되었다.[11][22] 그의 심장은 프라스카티 대성당 기념비 아래 작은 항아리에 담겨 보존되어 있다.[11]
3. 유산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실패 이후, 찰스는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등지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174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서도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하고 아헨 조약에 따라 추방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지냈으며, 1772년 루이제 추 슈톨베르크-게데른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1788년 로마에서 사망하면서 자코바이트 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의 사망으로 자코바이트의 왕위 계승권은 동생인 추기경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에게 넘어갔다. 그의 실패한 삶과 개인적인 문제들로 인해 생전의 인기는 다소 퇴색했지만, 사후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찰스 3세'라는 군주명은 2022년 9월 8일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윈저 왕가의 찰스 필립 아서 조지가 사용하고 있다.[42]
3. 1. 자손
찰스는 애첩 클레멘티나 워킨쇼와의 사이에서 딸 샬롯 (1753년 ~ 1789년)을 두었다. 하지만 샬롯은 사생아였기 때문에, 자코바이트의 왕위 계승권은 찰스의 동생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에게 넘어갔다.샬롯은 1770년대 후반부터 1784년경까지 페르디낭-막시밀리앙-메리아데크 드 로앙[43] 추기경의 정부(情婦)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는 샬롯의 아버지인 찰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샬롯은 아버지로부터 결혼 허락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샬롯은 페르디낭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딸 둘, 총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찰스 본인은 자신의 손주가 되는 이 세 아이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샬롯이 사망한 후, 세 자녀는 샬롯의 어머니인 클레멘티나 워킨쇼가 맡아 길렀다. 이들의 존재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샬롯과 페르디낭 드 로앙 사이의 세 자녀는 다음과 같다.
- 마리 빅투아르 아델라이드 "아레" 스튜어트 (1779년 6월 18일 ~ 1836년 4월 27일? 또는 1871년 3월?[44])
- 세 번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결혼 상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 1804년 11월 14일 파리 생 로크 교회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군대의 군의관 피에르-조세프-마리 드 생-율생(1763년 ~ 1818년 8월 5일)과 결혼하여 아들 테오도르-마리 드 생-율생(1809년 6월 29일 ~ 1838년 8월 6일)을 낳았다는 설.[45] 이 경우, 아들 테오도르가 부제로서 29세에 자녀 없이 사망하여 후손은 끊겼다.[51]
- 1803년경 폴란드 귀족이자 은행가인 파베우-안토니-루드비크-베르트랑 니콜로비치(1751년 ~ 1810년 4월 21일)와 결혼하여 아들 안팀-마레크-니코데무스 니콜로비치(1804년 9월 8일 ~ 1852년 2월 16일)를 낳았다는 설.[46][47][48][49][50] 이 경우, 아들 안팀과 그의 아내 안나-아우구스타-테레지아-레이넬 네겔펠스트(1809년 8월 14일 ~ 1848년) 사이에서 낳은 3남 1녀 중 장남 카롤-보로메우슈-파베우(1830년 ~ 1859년)와 장녀 율리아-테레자-안나-마리안나(1833년 ~ 1893년)가 후손을 남겨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52][53] 안팀의 차남 얀-에반게리스타-아우구스트(1832년)는 요절했고, 삼남 스타니스와프(1839년 ~ 1905년)는 형 카롤의 아내였던 아니엘라와 재혼했으나 후손은 2대 만에 단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 마리는 1823년 11월 29일 프랑스 귀족 콜베-잠스 도베르뉴(1764년/1765년 ~ 1825년 2월 2일)와 파리에서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14개월 만에 사별했다.
- 1826년에는 장 드 포와 리비우에서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 샬롯 막시밀리안느 아멜리 스튜어트 (1780년 여름 ~ 1806년 11월 26일)
- 1804년 8월 8일 장-루이 드 라 몰리에르(1763년 ~ 1846년)와 파리에서 결혼했다.
- 1806년 11월 26일 남자아이를 사산하고 같은 날 사망했다.
- 찰스 에드워드 오거스터스 막시밀리안 스튜어트 (1784년 5월경 ~ 1854년 10월 28일)
- 로헨스타르 백작(Count Roehenstart)을 자칭했다.
- 두 번 결혼했지만 두 아내 모두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했다.
3. 2. 문화적 유산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 지지자들 사이에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보니 프린스 찰리(Bonnie Prince Charlie)"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극적인 삶, 특히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와 이후의 도피 생활은 후대에 낭만적으로 그려지며 스코틀랜드인에게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고,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41]
찰스와 관련된 많은 고전 및 현대 포크송이 전해진다. 고전 포크송 중 <뉴스 프롬 모이다트(News From Moidart)>, <컴 오버 더 스트림 찰리(Come over the Stream Charlie)>, <오버 더 워터(Over the Water)>, <컴 이 바이 어솔(Cam ye bt Atholl)>, <사운드 더 피브로크(Sound the Pibroch)>, <보니 무어헨(Bonnie Moorhen)> 등은 1745년 찰스의 스코틀랜드 상륙과 이어진 전투를 노래한다. 반면, <윌 이 노 컴 백 어게인(Will ye no come back again)>과 유명한 <스카이의 뱃노래>는 컬로든 전투에서의 패배와 찰스의 스카이 섬을 거친 망명 과정을 다루고 있다. 찰스의 상징물인 흰 장미꽃은 현대 포크송 로지스 어브 프린스 찰리의 소재가 되었다. 이 외에도 민요 "Óró sé do bheatha abhaile", 보니 찰리, 누가 찰리 말고 왕이 될까?, 찰리는 나의 연인 등이 찰스와 자코바이트 운동을 기리고 있다.[30][31] 아일랜드 노래인 숀 클라라크 맥 도넬의 "모 길레 미어" 역시 그의 도피를 기념하는 노래이다. 대중적인 노래 ''바다 건너 내 보니가 있다''도 그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 노래는 1961년 토니 셰리던과 비틀즈에 의해 커버되기도 했다.[32][33]
찰스는 18세기부터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으며, 특히 낭만주의와 빅토리아 시대에 자코바이트 관련 주제가 유행하면서 많은 작품이 그려졌다.[23] 예를 들어, 프랜시스 윌리엄 토펌은 찰스가 스코틀랜드를 떠나는 장면을 그렸고, 이는 판화로 제작되어 1839년 레티시아 엘리자베스 랜던의 시와 함께 출판되었다.[24] 존 페티는 1892년에 찰스가 홀리루드하우스의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그렸다. 찰스와 자코바이트는 수많은 그림, 판화뿐만 아니라 그의 초상과 문장이 새겨진 술잔과 같은 기념품으로도 제작되었다.[25]
찰스의 이야기는 무대뿐만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1948년에는 데이비드 니븐이 주연한 전기 영화 ''보니 프린스 찰리''가 제작되었다. 최근에는 다이애나 개벌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역사 드라마 시리즈 ''아웃랜더''에서 배우 앤드루 고어가 찰스 역을 맡았다.[26] 또한 그의 삶은 ''보니 프린스 찰리에게'' (1897), ''젊은 왕위 요구자'' (1996), ''더 글로리'' (2000) 등 여러 역사극의 소재가 되었다.[27][28][29]
4. 가계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이며, 어머니는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손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이다. 따라서 찰스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와 모데나의 메리의 손자이자,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와 노이부르크의 헤드비히 엘리자베트의 외손자이다.[35][36][37] 그의 전체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 루이스 존 카시미어 실베스터 마리아 스튜어트(Charles Edward Louis John Casimir Silvester Maria Stuart영어)이다.
찰스에게는 남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그는 추기경이 되어 독신 서약을 했기 때문에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20] 이 때문에 스튜어트 가문의 직계 후계 문제가 중요해졌다.
1772년, 찰스는 51세의 나이에 32세 연하인 독일의 루이즈 스톨베르크게데른 공녀와 결혼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20] 찰스는 애첩이었던 클레멘티나 워킨쇼와의 사이에서 딸 샬롯(1753년–1789년)을 두었다. 찰스는 말년에 샬롯을 적법한 딸로 인정하고 '올버니 공작부인' 작위를 주었지만, 사생아였기 때문에 자코바이트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지는 못했다.[20][21] 샬롯은 결혼하지 않은 채 1789년에 사망했다.[21]
찰스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자코바이트의 왕위 계승권은 그의 동생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추기경에게 넘어갔다. 헨리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가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5. 평가
스코틀랜드 등 자코바이트 지지 기반이 강한 지역에서는 "'''보니 프린스 찰리'''" (Bonnie Prince Charlie영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깊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스튜어트 왕가의 왕위 복귀를 위한 마지막 희망으로 여겨졌으나, 여러 차례의 브리튼 섬 상륙 시도는 스코틀랜드 지지 세력과의 연계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당시 브리튼 상륙에 성공하고 초기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컬로든 전투 (1746년 4월 16일)에서 그의 군사적 판단 착오는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졌다.[11] 찰스는 부관 조지 머레이 경의 조언을 무시하고, 정부군의 우월한 화력에 노출되기 쉬운 평탄한 늪지대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또한, 안전을 이유로 최전선 후방에서 지휘하여 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정부군의 포격에 병사들이 노출되도록 방치하다 뒤늦게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전령이 사망하여 명령 전달에 실패했다. 결국 자코바이트 군의 공격은 조율되지 못한 채 정부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무너졌다. 비록 일부 부대가 질서 있게 후퇴하며 찰스의 도주를 도왔으나, 전투는 참패로 끝났다.
패배 후, 조지 머레이 경이 루스벤에서 병력을 재규합하여 항전을 이어가려 했으나, 찰스는 배신감을 느끼고 자코바이트 대의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지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고지와 헤브리디스 제도 등지로 숨어 다녔다. 많은 고지대 주민들이 정부가 내건 3만 파운드의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신하지 않고 탈출을 도왔으며,[13] 특히 플로라 맥도날드는 찰스를 하녀 "베티 버크"로 변장시켜 스카이 섬으로 피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16] 수개월간의 도피 끝에 그는 1746년 9월 19일, 프랑스 군함을 타고 스코틀랜드를 떠났다. 왕자의 카언은 그가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를 떠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대륙으로 망명한 이후 찰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방탕한 생활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과거의 열광적인 인기를 점차 퇴색시켰다. 1772년, 32세 연하인 루이제 추 슈톨베르크-게데른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했다. 애첩 클레멘티나 워킨쇼와의 사이에서 딸 샬롯 (1753년–1789년)을 두었으나, 사생아였기에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스튜어트 왕가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은 그의 동생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추기경에게 넘어갔다.
찰스는 1788년 1월 30일 로마에서 뇌졸중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2] 그의 죽음은 스튜어트 왕조 복귀 운동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프라스카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가, 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사후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어 아버지, 동생과 함께 안치되었다.
결론적으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위를 이끌 잠재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정치적 역량 부족과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실패한 비운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봉기는 당시 영국 중앙 정부의 지배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나, 그 실패는 스코틀랜드 민족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을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노래[41]가 불리는 등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지만, 이는 그의 실제 모습보다는 낭만적으로 미화된 측면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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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のゲメネ公ジュール=エルキュール=メリアデック・ド・ロアン(フランスの名門貴族ロアン家出身)の妻で、チャールズ自身から見れば、母方の従妹(母親同士が姉妹)でもあるモンバゾン公爵夫人、後のゲメネ公妃マリー・ルイーズ・ド・ラ・トゥール・ドーヴェルニュの間に儲けた非嫡出子。1748年7月28日生まれで、1748年12月または1749年1月18日に生後5ヶ月程で夭折した。なお、シャルルが生まれる3ヶ月前にチャールズはマリーとの関係を解消していた。
[39]
문서
マリー・ルイーズ・ド・ラ・トゥール・ドーヴェルニュとの愛人関係が終わった後に、愛人としたクレメンティーナ・ウォーキンショーとの間に儲けた娘。当時のイギリスのエージェントが残した幾つかの記録はシャーロットの他に、男子と2人目の子供の誕生に言及している。しかし、幼年期を生き延びたのはシャーロットのみ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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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ャールズの弟で、臨終に立ち会ったカトリック教会の聖職者(枢機卿)ヘンリー・ベネディクト・ステュアートは兄弟の曽祖父であるチャールズ1世の死亡日(清教徒革命(イングランド内戦)で処刑)と同じ日に死亡を宣言するのは不運だと考えた為、1月31日の朝に死亡したという記録を読ん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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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e Boat Song、188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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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イギリスの新国王はチャールズ3世
https://www.bbc.com/[...]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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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ャールズがかつて愛人関係を持ち、シャーロットの異母兄シャルルの母モンバゾン公爵夫人、後のゲメネ公妃マリー・ルイーズ・ド・ラ・トゥール・ドーヴェルニュ|マリー・ルイーズの夫であるモンバンソン公爵、後のゲメネ公ジュール=エルキュール=メリアデック・ド・ロアンの末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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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年4月27日に56歳で没したという説はチャールズ=エドワード・ステュアートの血縁を自称しているポーランドの美術史家ピオトル(ピーター)=ジェームズ・ピニンスキが唱えている説。これに対して、系図学者マリ=ルイーズ・バックハーストは'The death of Victoire Adelaide Roehenstart', in "The Stewarts" (The Stewart Society, Edinburgh, 2023), vol. 26, no. 4, pages 307-311.の中で、ヴィクトワール=アデライード・ロアンスタールが最終的に1871年3月にフランスのニースで亡くなった事を述べている。バックハーストの説に従うならば没年齢は91歳で、弟チャールズの没年と没年齢(1854年、70歳没)を優に超え、シャーロットとフェルディナンの子供達の中で最も長命で、結果的にフェルディナンとシャーロット、チャールズ・エドワード・ステュアート、その父ジェームズ・フランシス・エドワード・ステュアート最後の直系の血縁者で、ジャコバイト王位請求者の家系は1807年のヘンリー・ベネディクト・ステュアート(ジェームズ・フランシスの次男で、チャールズ・エドワードの弟)の死で男系は絶えている事は確実である為、女系でも絶えた事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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系図学者マリ=ルイーズ・バックハーストは "The marriages of the granddaughter of Bonnie Prince Charlie", in Genealogists' Magazine: Journal of the Society of Genealogists, vol. 31, no. 2 (June 2013) pages 45–49, and "The lives of the granddaughter and great-grandson of Bonnie Prince Charlie: new evidence", vol. 33, no. 11 (September 2021) pages 403-410.の中で、ヴィクトワール=アデライードと呼ばれていたシャーロットの次女が、1804年11月14日にパリのサン=ロック教会でナポレオンに仕える軍医ピエール=ジョゼフ=マリ・ド・サン=ユルサンと最初に結婚したという証拠を提供している。結婚記録には、マクシミリアン・ロアンスタールと彼の妻クレマンティーヌ・ルヴァンの娘であるヴィクトワール=アデライード・ロアンスタールとあり、弟チャールズと同じ両親の記録であることに言及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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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P. Pininski, Ostatni sekret Stuartów. Dzieci Karoliny księżnej Albany, 2001.
[47]
서적
Peter Piniński,The Stuarts' Last Secret(2002)
[48]
서적
Peter Piniński,Bonnie Prince Charlie: A Life(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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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P.Piniński, Dziedzic Sobieskieh. Bohater ostatniej wojiy niepodległość Szkocji(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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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イヤル・ステュアート協会の元会長エヴリン・クルックシャンクス(1926年12月1日 - 2021年11月14日。イギリスの歴史学者。17世紀と18世紀のイギリス政治史を専門とする)は2002年4月13日(当時は会長)のBBCニュースの記事の中でピオトル(ピーター)=ジェームズ・ピニンスキが「The Stuarts' Last Secret」の中で示した証拠を「本物」であると述べ、擁護している。一方、イギリスのジャーナリストで系図学者のヒュー・マッシングバードは "A More Than Likely Story". The Spectator: 48–49.(25 May 2002)で、「入念に研究された...確かに最も懐疑的な衒学者の満足の証拠」と述べ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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系図学者マリ=ルイーズ・バックハーストはFurther research on Theodore Marie de Saint Ursin, the great grandson of Bonnie Prince Charlie", vol. 34, no. 5 (March 2023) page 235.の中で、テオドールが1828年にフランスのイシー=レ=ムリノーにある聖シュルピス神学校に入学して同年に助祭に叙階されたこと、1832年までパリに住み、1838年8月6日にタルヌ県のカストル (タルヌ県)|カストルで29歳で助祭のまま、死去したことに言及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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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war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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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ャールズ=エドワード・ステュアートの血縁を自称し、7ヶ国の22の公文書館を捜索した前述のポーランドの美術史家ピオトル(ピーター)=ジェームズ・ピニンスキは上記の4つの著作でイギリス王室との繋がりを主張している。(1)チャールズ=エドワード・ステュアート(1720年12月31日 -1788年1月30日)、(2)シャーロット・ステュアート(1753年10月29日 - 1789年11月17日)、(3)マリー=ヴィクトワール=アデライード(1779年6月18日 - 1836年4月27日?)、(4)アンティム=マレク=ニコデム・ニコロヴィチ(1804年9月8日 - 1852年2月16日)、(5)ユリア=テレーザ=アンナ=マリアンナ・ピニンスカ(アンティムの長女。旧姓:ニコロヴィチ。1833年5月21日 - 1893年2月23日)、(6)アレクサンデル=アウグスト=エラズム・ピニンスキ(ユリアの四男。1864年6月2日 - 1902年5月16日。妻はイレーナ=マルティナ・ヴォランスカ(1871年11月11日 - 1929年2月14日))、(7)ミェチスワフ=ミハウ・ピニンスキ(アレクサンデルの次男。1895年8月27日 - 1945年。妻はヤニナ=マリア=ヘレナ=ヨアンナ・ジィヴィアク(1902年9月28日 - 1976年4月13日))、(8)スタニスワフ=ヒェロニム=ミェチスワフ=アレクサンデル・ピニンスキ(ミェチスワフの長男で一人息子。1925年2月16日 - 2009年8月9日。妻はジーン=イソベル=マーガレット・グラハム・オブ・キラーン(1926年1月24日 - 1999年))、(9)ピオトル(ピーター)=ジェームズ・ピニンスキ(スタニスワフの長男。1956年8月23日生誕。妻はマリー=ゾフィア=テレサ・バデニー(1960年8月22日生誕))。ピオトル(ピーター)=ジェームズ・ピニンスキには長男で一人息子のアレクサンデル=レオン=ヤン=スタニスワフ・ピニンスキ(1988年6月15日生誕。妻はマルタ・シィビンスカ)がいる。この系図に関して上記の系図学者マリ=ルイーズ・バックハーストはニコロヴィチ夫人の洗礼証明書、結婚証明書、死亡証明書の記録を調べ、彼女を「マリー・ヴィクトワール・ド・トリニー」と名付け、彼女が実際にはフェルディナンの長兄であるゲメネ公ジュール=エルキュール=メリアデック・ド・ロアンの非嫡出の娘、従ってマリー=ヴィクトワール=アデライードの父方の従姉妹であり、ステュアート家の血を引く子孫では無かった可能性が高いのではないかと示唆、結論付けている。一方、ピニンスキは"The Descendants of Bonnie Prince Charlie" in Genealogists' Magazine, vol. 31, no. 3 (September 2013) pages 110–111.の中で、バックハーストの仮説と解釈は最初の執筆から70年後に失われた市民権証明書の「再構成」に基づいており、マリー・ヴィクトワールの息子の出生を確認する文書は無いと主張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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